미국 최초의 2차대전 에이스(7) Air Combat Stories

 

 

 

 D 데이 이후 며칠 동안 406전대는 노르망디 상공으로 매일 출격했다. 지상군은 피로 얼룩진 해변을 뒤로 하고 내륙으로 천천히 진격해 들어갔다. 이 시기의 임무는 대부분 근접항공지원으로 적의 거점에 대한 기총소사, 로켓 공격, 급강하 폭격이 주된 일이었다. 이 시기 우리는 "택시 정류소"라고 부르는 시스템을 적용했다. 예를 들어 4대의 저그가 전선의 한 지역에 할당된다. 돌파하기 힘든 적진에 항공지원이 필요하면 그 구역의 지상군 지휘관은 무전으로 공중의 택시 정류소에 타격할 택시를 한대 부른다. 적은 특징적인 지형이나 색깔있는 연막탄에 의해 식별되고, 우리는 급강하해서 표적의 종류에 따라 폭격이나 로켓 공격 또는 기총사격을 가한다. 실수로 아군을 공격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보병부대는 지상에 오렌지색 형광천을 펼쳐 놓아 아군의 전선을 표시했다. 아군의 전방 모든 곳에 택시 정류소가 흩어져 있었고, 전투기들이 무장이나 연료를 소진할 때마다 계속 교체되었다. 이 시스템은 근접항공지원을 제공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특히 노르망디의 잡목숲을 통과할 때는 더욱 그랬다.
 우리는 또한 프랑스와 벨기에의 산업 시설을 타격하는 미국 폭격기를 호위하는 임무도 두 차례 수행했다. 6월 11일의 임무는 전형적이었다. 우리는 약 100대의 A-20, A-26, B-26을 근접호위했다. 폭격기들은 15,000피트의 고도에서 10마일에 걸친 공역에 늘어져 있었다. 폭격기의 강이었다. 요격하는 독일 전투기는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격렬하고 정밀한 대공포화가 집중적으로 작렬했다. 곧은 수평비행으로 폭격기들이 포탄의 폭발 속으로 날아가는 장면은 거의 어리석어 보였다. 전투기에 타고 있는 우리는 대공포에서 보호해 줄 방법이 없었다. 그저 한쪽에서 그들의 대형을 따라가며 만신창이가 되는 꼴을 지켜볼 뿐이었다.
 B-26 한 대는 직격탄을 맞고 공중분해됐다. 생존자는 없었다. 또 다른 한 발이 A-26의 한 쪽 날개를 날려버렸다. 그 폭격기는 지면을 향해 죽음의 하강을 시작했다. 부서진 비행기에서 두 명이 뛰어 내렸고, 그들의 낙하선이 펴졌다. 조종사인 듯한 나머지 승무원은 탈출하지 못했다. 다수의 폭격기들이 연기를 끌고 있었다. 한 대는 엔진에서 불꽃이 치솟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계속 포화 속으로 직진했다. 자신들이 받고 있는 심각한 손상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뇌보다 간이 더 컸다. 대포에 머리를 밀어넣고 스스로 발사끈을 당기는 것과 같았다. 하느님! 전투기를 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폭격기와 승무원의 피를 이렇게 낭비할 순 없었다. 영국 폭격기 사령부의 승무원들은 4년 넘게 전투에서 교훈을 얻었지만 미국의 폭격기 사령부는 그들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주간 공습에서 그런 고도로 줄지은 폭격기들은 직선 수평 비행시키는 것은 적의 대공포 사수에게 완벽한 표적을 제공했고, 살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날의 임무에서 손실된 폭격기는 12대였고, 35~40명이 승무원이 희생되었다. 대부분 불필요한 손실이었다.
 이미 얘기했듯이 노르망디의 상륙지점 상공에서 적기의 활동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6월 18일 나는 운좋게 Me.110 한 대와 교전했다. 그 비행기는 슈르브르 부근 프랑스 해안에서 우리 배를 쏘아대고 있었다. 독일 조종사는 전속력으로 접근하는 나를 보더니 내 쪽으로 방향을 돌려 정면으로 날아왔다. 내 기체에는 5인치 로켓 10발이 탑재되어 있었다. 헤드온 공격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는 모든 로켓을 쏘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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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장거리 호위기 Me.110]

 


 한 발도 맞지 않았지만 그는 많이 놀랐는 지 오른쪽으로 급격히 선회했다. 나는 내 저그를 왼쪽으로 팍 밀어부쳐 그 깍두기의 후방 50야드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8정의 50 구경 기관총을 모두 발사했다. 적기가 폭발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비행기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내 기관총의 사격을 받은 Me.110은 공중에서 완전히 분해됐다. 아무도 탈출하지 못했다. 배의 승무원들은 다음 날 내 격추를 확정해줬다.
 6월의 공중전은 대부분 프랑스와 벨기에 내륙에서 일어났다. 그곳에서 제9공군의 전투기와 폭격기 전대는 끊임없이 적의 수송체계와 비행장을 타격하고 있었다. 제9공군의 전투보고에 의하면 6월 30일까지 187대의 독일 비행기가 격추되고, 미확인 격추는 33대이며 63대가 손상되었다. 추가로 지상에서 34대가는 파괴되고, 15대는 손상되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른 우리 9공군의 손실도 컸다. 203대의 전투기, 39대의 폭격기, 43대의 병력수송기, 17대의 정찰기를 잃었다. 전투기는 대부분 적지 깊숙한 곳에서 지상 표적을 타격하던 중 대공포에 의해 손실되었다. 특별히 유념해야 할 것은 6월 동안 우리 전투기들은 거의 31,000소티, 하루에 천소티를 출격한 것이다!
 우리의 육군 병사들이 노르망디의 해안을 빠져나와 적에 맞서 기동할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벌인 치열한 전투의 이야기는 다른 저자들이 상세히 서술해 놓았다. 곧 그들은 반도를 가로지르며 진격했고, 그 지역의 독일군 전력을 갈라놓았다. 쉐르부르에서는 대규모 독일군이 참호와 바리케이드로 도시를 요새화 시켜 놓았다. 독일 장군은 절대 항복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싸울 것을 선언했다. 마지막 순간은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6월 22일 정오경 영국의 타이푼과 머스탱 10개 비행대대가 적 진지에 로켓과 기총 사격을 가했다. 그 다음 우리들 제9공군의 전투기 557대가 급강하 폭격으로 500파운드 RDX 폭탄을 투하했다. 약 520톤이나 되는 양이었다. 연합군 지상부대의 공격은 14:00 경에 시작되었고, 이를 지원하는 9공군 소속 375대의 중형 폭격기들은 또다시 590톤의 폭탄을 독일군에게 퍼부었다. 7월 1일 9일간의 전투 후 적은 쉐르부르를 내주었고, 재보급에 사용될 큰 항구가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다. 쉐르부르 전투에서 9공군의 손실은 30대 격추와 132대 손상이었다. 모두 대공포에 의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노르망디를 빠져나와 프랑스의 평야로의 진격에 주의를 돌렸다. 우리는 7월 24일과 25일에 걸친 24시간 동안 생 로를 두 번이나 폭격했다. 동원 가능한 거의 모든 폭격기와 전투기가 투입됐다. 대규모 비행대가 공중 열병식이라도 하듯 각 편대는 표적을 차례로 가로질렀고, 폭탄이 쏟아진 지역은 완전히 증발했다. 생 로에는 먼지와 화재, 잔해만이 남았다. 우리는 이번 대규모 공습으로 유용한 교훈을 얻었다. 너무 많은 폭격은 우리 지상군의 전진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모든 거리와 길이 파괴됐고, 거기에 더해 부서지고 무너진 건로 인해 아군의 전차, 보병, 포병, 보급 차량의 행렬은 이 완전히 괴멸된 도시의 잔해를 통과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때 즈음 406전투전대는 영국에서 노르망디로 이동하여 미국 공병이 상 메르 에글리즈라는 작은 마을 근처의 농작지에 설치한 야전 비행장에 자리를 잡았다. 상륙 작전이 시작됐을 때부터 해안 주위에 3개의 비상 활주로가 건설되었고, A-1,A-2, A-3로 명명되었다. 우리 비행장인 A-6에는 타르지와 철사로 만들어진 활주로가 하나있었다. 공병들은 불도저를 가져와서 활주로와 유도로로 사용될 땅을 평평하게 고른 후 철사가 감진 나무 토막을 들고 와서 맨 땅 위에 철사를 깔았다. 그런 다음 철사 위에 타르지를 올려놓고, 타르지의 가장자리에 뜨거운 타르를 부어 밀봉했다. 이렇게 만든 활주로 표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륙하기 전 시동을 걸 때는 주의해야 한다. 브레이크를 완전히 걸었더라도 비행기가 앞으로 미끄러지며 바퀴가 타르지를 잡아 뜯는 수가 있다.
 A-6의 우리 활주로는 짧았을 뿐 아니라 거의 해변에 있었다. 그래서 북쪽을 향해 이륙한다면 재빨리 선회한 후 미친 듯이 상승해야 했다. 안그러면 상륙 함대가 쳐놓은 공습 방지용 기구와 충돌할 것이다. 반면 남쪽을 향해 이륙하면 랜딩 기어를 접기도 전에 전선을 넘어가 버린다. 착륙할 때도 똑같은 문제가 생긴다, 기구나 독일군 둘 중 하나 위로 날아가야 한다. 지상활주나 이륙을 할 때는 두꺼운 먼지 구름이 비행장을 메웠고, 비우는 날씨에는 온통 진창이 됐다.
 우리의 숙영지는 모두 천막으로 되어 있었지만 큰 주거용 트레일러가 두 대 있어서 전대 작전실과 통신실로 사용되었다. 독일 폭격기(대부분 Ju.88)은 야간에 해안을 수도 없이 폭격했기 때문에 개인 참호를 파두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었다. 독일기가 상공에 나타나면 아군 대공포는 막대한 양의 사격을 가했고, 무수한 탄환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실제로 탄이 떨어질 때 나는 휘파람 같은 소리나 내 옆의 땅에 부딪히는 충격이 들렸다. 나는 창조성을 발휘하여 작전실 트레일러 아래에 참호를 팠다. 그것은 측면과 상면에 훌륭한 엄폐물을 제공했다.
 우리는 모두 프랑스를 해방시키기 위해 왔다. 그러나 우리보다 독일놈들을 더 편드는 프랑스 인들도 약간 있었다. 한가지 예을 들면 낮 동안에 프랑스 아가씨들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 비행장과 미국군의 부대 주위를 돌았다. 아마도 남친이 독일군 병사일게다. 그들이 우리가 파놓은 참호의 위치를 봐두었다가 밤중에 조용히 숨어들어 그 방향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나는 내 참호 주위에 12~15피트 길이의 원 형태로 10인치 높이의 철사를 둘렀다. 그리고 낡은 C-레이션 깡통에 자갈을 넣고 그것을 철사에 달았다. 밤에 누군가 철사를 건드리면 깡통 속의 자갈이 소리를 냈고, 어느 정도 경보장치 노릇을 했다. 오래전에 내가 받은 보병 훈련은 꽤 쓸 만했다. 곧 A-6에 있는 대부분이 내 C-레이션 깡통 경보장치를 도입했다. 
 천막으로 된 기지에서의 생활은 구질구질해지기 쉬웠다. 네다섯 명이 한 천막에서 4개월을 보내고 나면 더욱 그러하다. 철모로 차가운 물을 퍼서 씻고 면도하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누구나 자기 옷은 자기가 빨았다. 대령이든 이등병이든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비누는 매우 귀했다. 우리 제복의 옷감은 모직이나 개버딘이었는데 항공유로 드라이 크리닝했다. 당연히 우리 몸에서는 유조차 냄새가 났고, 담배에 불을 붙을 때는 주의해야 했다.
 우리의 야전 식단은 K 레이션, C 레이션, 텐 인 원 레이션이었다. 이 음식은 데워 먹을 수만 있다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한가지 방법은 5갤런 들이 기름통의 뚜껑을 뜯어내고 안에 모래를 채우는 것이다. 거기에 항공유를 약간 붓고 불을 붙인다. 이 불은 약 10분이나 15분 동안 계속 탄다. 그 시간이면 음식을 데우거나 커피나 차를 탈 물을 끓이기에 충분하다. 영국군의 전투식량은 탈 수 있는 물질을 머금은 왁스같은 물질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용기에 성냥을 갖다 대기만 하면 2분 내에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걔네들의 소고기 통조림보다는 우리 음식이 맛있었다.
 어느 날 L.C와 나는 남는 C 레이션 몇 개를 프랑스의 농부에게 줬다. 영국에서 들은 얘기 덕에 우리는 그 농부와 가족들이 굶어죽기 직전일 거라고 생각했다. 친절한 농부는 그날 저녁 우리를 근처의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우리는 최소한 따뜻한 C 레이션을 먹겠거니 생각했다. 왠걸! 비프스테이크와 감자 후라이, 당근, 핫롤, 디저트에 커피까지 대접받았을 때 우리가 느낀 기쁨과 분노를 상상해보라. 망할 프로파간다는 불쌍한 프랑스인들이 독일 치하에서 기아에 허덕인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보다 오히려 잘 먹고 있었다. 최소한 노르망디에서는 그랬다.
 A-6에서 잠깐 머무르는 동안 우리는 이웃한 영국 공군의 또다른 수법을 배웠다. 캉 근처에는 타이푼 비행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빈 보조연료탱크를 장착한 기체를 영국으로 보냈다. 그 비행기는 탱크에 맥주를 가득 채우고 15,000피트 고도로 비행하며 프랑스로 돌아왔고, 착륙할 때쯤이면 딱 좋은 온도로 냉각되어 있었다. 우리는 곧 150갤런 탱크로 그들은 따라했다. 영국 친구들은 본토의 안락함을 전장에서 누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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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공군의 타이푼 전투기. 주로 지상 공격에 사용되었다.]

 


 우리는 2주후 크레트비으에 있는 전에 독일군이 사용하던 기지로 이동했다. A-14로 불리는 이 비행장은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독일군은 철수하기 전에 지뢰와 부비트랩을 모든 곳에 설치해 놓고 떠났다. 우리 측 공병은 수백개의 지뢰를 발견해서 파냈다. 하지만 여전히 어디에 가든 무엇을 만지든 주의해야했다. 독일군의 P-38 권총, 자동식 권총, 헬멧, 마우저 소총을 집어 들거나, 바닥에 눕기만 해도 지옥으로 날아가 버릴 수 있다.
 나는 급강하 폭격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어느 저녁 이상한 일을 겪었다. 내 항로는 파리와 가까운 곳을 지났기 때문에 나는 잠깐 동안 가서 보고 오기로 했다. 공중에서 보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가로수가 늘어선 널찍한 대로, 불빛이 비치는 센강, 유명한 에펠탑이 우뚝 서있었다. 그리고 Me.109 한 대가 어두워지는 하늘에서 급강하하며 나를 손쉬운 먹이로 삼으려 했다. 나는 스로틀을 밀며 독일기를 향해 선회했다. 그리고 에펠탑 상공 6,000피트에서 좁은 원을 그리며 결투가 시작됐다. 우리는 몇 차례 서로를 향해 사격을 가했지만 어느 쪽도 제대로 된 편차 사격을 할 수 있을 만큼 선회력을 얻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선회하며 총성만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동시에 상대편 기체에 있는 하얀 별 모양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Me.109는 사실 길잃은 8공군 소속 P-51이었다. 그는 내 P-47을 FW.190로 오인한 것이다! 그 비행기들은 서로 비슷했다. 우리는 편대로 비행하며 A-14로 돌아왔다. P-51 조종사는 자신의 기체에 연료를 주입하고 영국을 향해 날아갔다. 그 8공군 친구는 첫번째 임무인 폭격기 호위를 위해 출격했다. 그는 편대와 떨어져 길을 잃었고, 두 시간 동안 홀로 프랑스 상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적지 상공에 머물렀지만 독일군의 공격을 받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이번 임무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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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51B. 레이저백 캐노피를 장착한 초기형 머스탱은 Me.109와 실루엣이 비슷했다.]

 


 7월 28일 우리는 프랑스 내륙 깊숙한 곳에서 독일군 비행장을 로켓과 기총으로 공격하는 길고 험한 임무를 맡았다. 언제나 그렇듯 수많은 대공포가 치열하고 정확한 사격을 가했다. 우리는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지면 가까이에서 비행했고, 가끔 나무 꼭대기보다 낮게 날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낮은 고도를 고속으로 날아가서 주기된 적 항공기를 조준하고, 대공포화를 피해 사격을 날린 다음 폭발하는 항공기의 파편을 피하기 위해 급상승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깍두기들은 완전히 농땡이 치고 있었다. 그들의 기체는 모두 지상에 있었고, 우리는 그것들을 싸그리 날려 버렸다. 우리는  격납고, 건물, 연료와 탄약 저장소도 공격했고, 움직이든 안 움직이든 차량에도 사격을 날렸다. 우리가 승리를 가득 안고 비행장을 떠났을 때는 부서지고 불타는 비행기와 시설들만 남아 있었다. 우리는 30대의 적기를 파괴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나는 그 중 4대를 차지했다. 우리 중 다수의 기체가 대공포에 피격되었지만 A-14까지 안전하게 귀환했다.

 

 

 

 

 출처: Dunn, William R, Fighter Pilot : the First American Ace of World War II, 137-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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