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초의 2차대전 에이스(2) Air Combat Stories




 어느 날 이른 아침 우리 비행대대는 스크램블이 걸렸다. 적기는 Ju.88과 He.111로 이루어진 독일 폭격기 무리였고 영국 해협을 건너 접근하고 있었다. 테임즈 강 어귀 약 2만 피트에서 우리는 호위 중인 2개 비행대대의 Me.109과 조우했다. 우리가 아직 밝은 태양을 보며 동쪽으로 상승하고 있을 때 109 두 대가 우리의 대형 앞에서 급강하했다. 그들의 기총은 우리를 향해 불을 뿜었다. 이것은 독일군의 오래된 수법으로 의욕 넘친 친구들이 미끼를 쫓느라 대형을 이탈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가장 먼저 나타난 109 두 대는 추격하지 말라는 경고를 항상 받았다. 편대를 이탈하면 다른 독일기 두 대가 바로 뒤에 따라붙고 포위돼 버린다.
 우리 비행대대의 조종사 중 마이크 콜렌도르스키라는 폴란드 계 미국인이 있었는데 이 날 그는 불행히도 미끼에 낚였다. 첫번째 두 109가 스쳐 지나갈 때 마이크는 자신의 허리케인을 급격히 선회시켜 그들의 꼬리를 물었다. 순식간에 두번째 109 두 대가 급강하해서 마이크의 꼬리에 붙었고 그 둘은 기관포와 기관총을 발사했다. 누군가 무전으로 경고를 외쳤지만 너무 늦었다. 마이크의 허리케인은 피격됐고 나는 마이크가 칵핏 내에서 죽었다고 추정한다. 그는 탈출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마이크의 허리케인이 뒤집힌 채 빙글빙글 돌며 수천 피트 아래의 강 하구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 경우에서 보듯 전투에서 이런 종류의 실수는 갑작스럽고 불필요한 죽음을 초래한다. 이 사건이 일어나는 데 걸린 시간은 이것을 글로 쓰는 것보다 짧았다.
 독일의 폭격기 대형은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 6개 비행대대의 공격을 받았고 기수를 돌려 기지를 향했다. 연료가 떨어진 Me.109들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우리 비행대대는 아직도 전투 고도보다 아래에서 상승 중이었고 그 날은 마이크외에 아무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northweald.jpg

                                 [North Weald 비행장의 전경. 독수리 비행대대는 41년 6월 말에 이 기지로 이동했다.]

 비행대대 스크램블은 간혹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곤 했다. 예를 들어 스크램블 명령이 처음 전달됐을 때 관제사는 8천 피트에 적기 15대 이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비행대대 전체로 요격하면 쪽수가 그리 딸리진 않는다. 그러나 이륙 후 관제사는 침공하는 적에 대해 더 많은 전술 정보를 무전으로 전달한다: "만 피트에 20대 이상, 만 5천 피트에 40대 이상, 2만 피트에 30대 이상." 제길, 이제 공습 부대에는 100대 이상의 적기가 있고 그들을 요격하러 상승 중인 아군 전투기는 1개 비행대대 12대 뿐이다. 전세는 무려 8대 1이다!
 적기가 폭격기와 전투기를 포함 총 360대 달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 때 스크램블이 걸린 영국 공군의 10개 비행대대가 요격에 나섰다. 켄트의 동쪽 해안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 거대한 공중전은 30분 동안 독일기 185대가 격추된 후 끝났다. 영국 공군은 약 40대의 전투기를 잃었지만 우리 조종사들 중 반 이상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후 지상이나 해상에서 구조됐다. 단 3대의 독일 폭격기만이 램즈게이트 근처의 영국 해안을 건널 수 있었고 그나마 그들은 공터에 폭탄을 버려야 했다. 나머지 독일기들은 우리 전투기의 맹공격 앞에 꼬리를 돌렸고 폭탄을 뿌리며 프랑스로 날아갔다. 이 전투에서 나는 2대의 독일 폭격기, Ju.88과 Do.17에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Ju.88에서는 단지 파편 몇 개만 튀었을 뿐이고 Do.17은 엔진에서 연기를 내며 귀환했다.
 1941년 7월 2일 드디어 내게 사건이 찾아 왔다. 12대의 블렌하임 폭격기들이 점령된 프랑스의 릴 발전소를 폭격하기 위해 서커스 29(주간 폭격기 공습의 암호명)를 구성했고 우리 비행대대는 전투기 엄호의 일부가 됐다. 릴에 도달하기 직전 우리는 Me.109E와 Me.109F로 구성된 적 2개 비행대대의 공격을 받았다. 폭격기들이 표적을 타격하고 30분 후 그라벨리네 근처의 프랑스 해안을 건널 때까지 적의 공격이 계속됐다. 우리는 허리케인을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블렌하임의 근접 호위를 담당했다. 고공 엄호는 우리 전투 비행단에 소속된 빠른 스핏파이어가 수행했다.
 나 는 Red 2 위치에 있었고 편대장은 패디 우드하우스 소령이었다. 나는 Me.109E 한 대가 약 6천 피트에 있던 폭격기 대형 속으로 급강하하며 사격을 가하는 것을 보았다. 109 조종사는 왼쪽으로 이탈했고 정확히 내 앞에 있었다. 거리는 아마 75나 100 야드 정도였을 것이다. 나는 스로틀을 열며 그 Me.109를 좌측 후방에서 공격했다. 4초 동안 한 번 사격한 후 세 차례의 사격을 각각 2초 동안 실시했다. 약 50 야드 거리에서 (독일기는 내 방풍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내 기관총탄이 동체와 날개뿌리를 온통 강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연기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3천 5백 피트까지 하강하며 공격을 계속했고 직접 탄도 거리에서 다시 사격을 가했다. 이제 109는 격렬히 불타기 시작했고 지면을 향해 수직으로 강하하더니 네거리 근처에 충돌하며 큰 폭발을 일으켰다. 깍두기 하나 해치웠다!
 사람들은 가끔 적기를 격추하고 적 조종사를 죽이면 어떤 기분이 드는 지 물어 봤다. 솔직하게 얘기해서 나는 고무됐다. 그 놈이 나를 격추하기 전에 내가 격추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물론 나는 첫 승리를 거두어 기뻤다. 그것이 내가 여기 있는 이유였으며 다행히도 독수리 비행대대의 다른 조종사인 피트 프로벤자노와 밥 매닉스가 내 격추를 확인해 줬다.
 나는 이 자리에서 영국 공군이 격추 확인에 매우 신중했음을 밝히고자 한다. 그들은 격추 주장을 "확증 파괴", "비확증", "미확인"으로 분류했다. 격추 주장을 확증 받기 위해선 적기가 추락하거나 공중에서 폭발 혹은 분해되는 것이 목격되어야 했다. 아니면 격추된 적기가 노획되거나 조종사가 탈출하는 것이 목격돼야 했다. 그리고 이런 증거들은 격추를 주장한 조종사가 아닌 다른 조종사가 증언해줘야 했다. 비확증 격추란 격추했다고 주장하는 조종사 이외에는 그 격추를 보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미확인 격추는 적기가 격추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로 추락한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고 파괴 여부가 불분명한 경우이다. 또한 "손상"이라는 분류도 있었다. 그것은 단지 독일 비행기에 구멍이 몇 개 생겼을 뿐 격추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영국 공군에서 확증 격추를 얻기는 매우 어려웠다. 도그파이트가 벌어지는 와중에는 모두 다른 놈을 쏘거나 자기 꽁무니 간수하느라 여념이 없다.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부의 본부는 모든 격추 주장을 서면이나 구슬 된 전투 보고에 근거하여 최종적인 판정을 내렸다. 나는 영국 공군이 격추 주장을 의도적으로 과장하거나 잘못 발표한 사례가 그리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전투기에는 16mm 건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어서 사격 시에 자동으로 작동했다. 그것이 제대로 움직이고 사격 편차각이 너무 크지 않다면 격추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됐다.
 독일의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독일 공군이 격추 주장을 승인하는 방법은 상당히 달랐다. 한 예로 독일 전투기 조종사들은 목격자 없이 확증, 비확증, 미확인, 손상을 주장할 수 있었고 그것들이 모두 인정됐다. 적 에이스들이 높은 격추수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경험 적은 조종사들이 에이스의 엄호만 한 반면 그들이 대부분의 사격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에이스들이 극도로 높은 격추를 달성할 수 있게 해 줬지만 편대장을 엄호하기 바쁜 윙맨들은 격추되기 쉬웠다.
 독일군 격추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 논쟁을 벌일 의도는 없다. 그러나 어느 루프트바페 에이스는 한 번의 교전에서 13기의 격추를 주장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그들의 기총이 우리보다 탄약을 많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경우 그는 1초 동안의 사격으로 한 기씩을 격추했다는 얘기가 되며 이는 믿기 어렵다. 그 외에도 여러 조종사들이 하루에 17기 혹은 18기의 격추를 주장했다. 한 독일 에이스는 영국 해협 상공에서 교전한 후 스핏파이어 3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기지에 착륙한 후 그의 기체에서는 기총이 전혀 발사되지 않았고 탄약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이 밝혀졌다. 루프트바페의 기록에 따르면 94명의 독일 에이스들이 총 13,997기의 연합군기를 격추했다. 약 100 명의 독일 조종사들이 각각 100기에서 150기 격추를 주장했고 그들 중 15명은 200기 이상, 2명은 300기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적이 이 정도 격추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전쟁에서 이겼을까? 연합군 최고 에이스들은 대개 40기정도 격추했다.1)
 내 첫 번째 확증 격추에 이어 나는 우리 비행대대에서 상관에게 편애 받는 집단과 대립하게 됐다. 캘리포니아 출신 조종사인 거시 데이먼드와 나는 둘 다 서커스 29에서 격추를 달성했고 이는 독수리 비행대의 창설 이래 첫 승리였다. 공식 전투 기록에 의하면 내 격추는 12시 35분에 일어났고 거시는 12시 40분에 격추했다. 이론의 여지없이 나는 독수리 비행대대에서 적기를 격추한 최초의 조종사였다. 그러나 나는 그 파벌의 일원이 아니었기에 내 주장은 거시의 전과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다. 거시가 파벌의 일원이긴 해도 그가 이 일에 관해 뭔가 손을 썼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 당시 이런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후 일 내 군 경력에는 영향을 줬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군사 항공 역사가들이 독수리 비행대대의 전투 기록을 검토했고 공군부의 영국 공군 역사부는 의심할 바 없이 내가 적기를 격추한 최초의 독수리 비행대대 조종사라고 확증했다. 그 전투 기록은 지금도 문서로 남아 있다.)
 4일 후인 7월 6일, 6대의 스털링 폭격기로 구성된 서커스 35가 릴 철강소를 폭격했다. 그들을 호위하던 중 나는 No. 306 (폴란드) 비행대대 소속 허리케인을 목격했다. 그는 Me.109E 한 대를 공격하고 있었고 적기는 좀처럼 격추되지 않았다. 폴란드 조종사는 109의 약 250 야드 뒤에서 기관총탄의 줄기를 퍼붓고 있었고 나는 독일기가 총탄에 맞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더 가까이 있었고 109보다 약간 높았기 때문에 폴란드 친구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독일기의 꼬리 쪽으로 선회한 후 50 야드도 안되는 거리에서 두 번의 점사를 명중시켰다. 적기는 검은 연기가 토하기 시작하더니 수직으로 떨어 졌고 지면에 부딪혀 폭발했다. 이 전투는 프랑스의 메르빌 상공 약 만 2천 피트에서 14시 30분에 일어났다.
 우리는 영국으로 귀환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해안에 도달할 때까지 독일 전투기들은 계속 우리의 대형을 공격했다. 4발 중폭격기는 한 대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스핏파이어 2대와 다수의 허리케인이 격추됐다. 독일군은 8대의 Me.109E와 109F가 격추됐고 약 6대가 손상됐다. 나는 이번에 스털링을 처음 호위해 봤기 때문에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옆에서 나란히 날았다. 후방 총좌의 사수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 때 나는 그가 비행 헬멧 위에 철모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만약 내가 그 사수이고 대공 포화를 받아야 한다면 나는 그 철모를 깔고 앉을 것이다.
 306 비행대대의 폴란드 조종사는 나를 따라 노스 윌드 비행장에 착륙했다. 나는 정보 디브리핑 시간에 그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레온 H. 야우그쉬였으며 젊고 멋진 친구였다. 그는 폴란드 침공 이래 줄곧 독일과 싸우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Me.109와 그의 허리케인 사이에 들어 왔을 때 그는 거의 나를 격추할 뻔 했다고 했다. 무장사들은 레온이 1,200발 내가 400발을 발사했다고 했다. 그 정도면 독일기는 벌집이 됐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전투 보고를 준비했고 비행대대 스파이인 라비에게 보고했다.
 다음 날 전투기 사령부는 레온과 내게 각각 반 대 격추를 공인했다. 그 때 격추된 독일 조종사는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의 조카라고 추정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진실을 알지 못한다. 유명한 적군의 에이스이자 당시 독일 전투기 부대을 지휘했던 아돌프 갈란트 소령은 괴링의 조카가 탄 Me.109E가 그 시각과 장소에서 격추됐다고 후일 증언했다. 물론 레온과 내가 그를 격추했다는 확증은 없다. 하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있다. (레온 H. 야우그쉬는 현재 캘리포니아 주 로스 알라미토스에 살고 있으며 4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 친구이다.)
 7월 21일 아침 서커스 54가 출격했다. 이번에도 릴 철강소를 폭격하는 스털링 폭격기의 근접 호위였고 나는 White 분대를 이끌고 있었다. 프랑스 해안을 통과한 이래 계속해서 적의 88밀리 대공포가 작열했다. 흉측하게 생긴 검은 연기는 점점 가까이에서 터지기 시작했고 포탄의 폭음이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포탄은 서커스 대형의 뒤, 약간 아래에서 터졌고 거의 피해를 주지 않았다. 표적 상공에서 대공포는 정확도와 집중도를 더해 갔다. 그것은 아직 적 전투기가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의미했다. 분명 스크램블이 늦게 걸린 것이다.
 스털링들이 폭탄을 떨구고 얼마 후 표적은 휘청거리는 폭발과 충격파, 소용돌이치는 먼지, 연기와 잔해에 묻혔고 우리는 표적 지역을 이탈하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우리 대형의 뒤에서 고속으로 상승하며 폭격기를 아래쪽에서 공격하는 Me.109F 두 대를 포착했다. 시각은 약 8시 35분이었으며 우리는 만 6천 피트에서 비행 중이었다.
 나는 내 허리케인을 급선회로 당겼고 White 2인 토미 맥거티는 내 오른 쪽 날개 옆에서 비행 중이었다. 깍두기 하나가 우리의 공격을 보고 격렬한 회피 기동을 실시했다. 그리고 빠르고 가파른 급강하로 이탈했다. 느린 허리케인에 타고 있던 우리는 그를 잡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Me.109E라면 우리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형인 109F는 우리에게 너무 빨랐다. 스핏파이어라면 그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Me109-F4-12s.jpg
  
                                [Me-109F. 동체와 날개가 매끄러운 유선형으로 설계되었고 이전 모델에 비해 속도가 증가했다.]

 두 번째 독일기는 회피 기동하지 않고 얕은 각도로 상승하며 선회했다. 나는 그의 좌측 50 이나 60 야드 거리에서 공격했고 8정의 기관총으로 두 번의 점사를 가했다. 109의 러더와 왼쪽 엘리베이터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오른쪽 엘리베이터도 총탄에 맞아 너덜너덜해졌다. 그 독일기는 얕은 각도로 강하하더니 곧 하강 각도가 기울어 졌고 뒤집힌 채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종사는 캐노피를 제티슨시키고 매우 빠른 속도에서 탈출했다. 그는 분명 낙하산이 펴질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최소한 그 운좋은 자식은 불타는 기체에서 빠져 나왔다. 나는 그 109의 추락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조종사가 없는 상태로 만 4천 피트 아래의 지면과 충돌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또다시 확증 격추를 획득했다. 내 건 카메라가 모든 것을 촬영했다.






 출처: Dunn, William R, Fighter Pilot : the First American Ace of World War II, 55-61

 



역자 주
    1. 독일 에이스들의 격추 기록이 연합군 에이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비현실적인 전과는 아니다. 격추 기록의 차이는 독일 에이스들이 훨씬 많이 출격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에리히 하르트만은 1,404회의 출격으로 352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한다. 미국 최고 에이스인 리처드 봉은 146회의 출격으로 40대의 격추를 기록했다. 1회 출격 당 격추 수를 계산해보면 하르트만은 약 0.25대이며, 봉은 약  0.27대로 오히려 더 높게 나온다. 리처드 봉이 하르트만과 비슷한 횟수를 출격했다면 더 높은 전과를 세웠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Tag :

Leave Comments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회원 가입후에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