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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코드의 성공은 토론토 에어쇼로 날아갔을 때 처음으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거기서 나는 SR-71 블랙버드 정찰기의 조종사들을 만났다. 그들은 우주복과 헬멧을 쓰고 쿠바 상공 6만 피트 고도에서 사진 촬영 임무를 수행하는데 익숙해져 있다고 말했다. 어느 날 관제탑에서 그들에게 오른쪽으로 20마일 비키라고 했고 그들은 이유를 물었다. 관제탑은 '카라카스에서 출발한 항공기 한대가 옆으로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조종사들은 '정말 그랬다. 셔츠를 입고 샴페인을 마시는 승객을 태운 에어프랑스의 콩코드가 우리 옆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신들은 우주복을 입고 비좁은 콕핏에 앉아 있었다. 


- 브리티쉬 항공의 콩코드 기장 저크 로우



 

1. 개발 경쟁과 유럽의 추월


보잉은 1952년부터 초음속 수송기(SST)의 설계에 손을 대기 시작했으며, 관련연구 또한 여러가지 수행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1958년에 SST 상설 연구위원회가 발족된데 이어, 1960년부터는 기초 연구 예산만 100만 달러에 달할정도로 관심과 기대가 커지고 있었다. 이 연구 개발 과정에서 설계초안이 일부 제시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모델 733이라고 했다. 그 초안 대부분은 델타익을 기본으로 한 것이었지만, 1959년에는 해군과 공군의 공통 차세대 전투기 사업인 TFX(Tactical Fighter Experimental) 계획을 반영한 가변익 설계안도 발표되었다. 비록 보잉은 TFX 경쟁에서 패해 제네럴 다이내믹스 F-111이 선정 되었더라도, 1960년에는 가변익을 포함한 각 설계안에 대한 사내 경합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150석을 배치하고 대서양 횡단 비행이 가능한 기체를 기본으로 하는 방안이었으며, 가변익 구조가 매우 유망하다고 판단되었다. 


1962년 상반기에, 영국의 BAC와 프랑스의 쉬드 아비아시옹(Sud Aviation) 양사가 추진하고 있는 초음속 수송기 계획의 통합에 대한 잠정 협의가 이루어졌다 . 같은 해 중반까지 이 프로젝트는 진실로 드러났고, 당장이라도 설계안이 제시된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그해 11월 콩코드를 공동으로 생산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유럽 이외의 항공 업계에서는 큰 충격에 빠졌다. 당시는 앞으로 민간 항공기의 대부분이 초음속기가 될 것으로 널리 믿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소련은 물론 미국까지도 크게 앞지른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체재 선전에 눈이 벌건 소련도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소련도 1962년에 초음속 수송기 Tu-144 계획을 발표하자, 이제 미국에서도 SST 개발에 뒤처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갔다.


1963년 6월 5일,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콩코드를 능가할 여객기 개발 계획에 대한 자금 투입을 승인했다. "국립 초음속 수송기 계획"이라고 불리게 될 이 사업은 개발비의 75%를 정부가 부담하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FAA(연방 항공국) 국장을 지낸 후 팬암 사장으로 취임한 나지브 하라비(Najeeb Halaby : 1915~2003)는 이미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콩코드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보다 선진적인 설계안으로 미국 항공업계의 기술력을 과시하고자 했다. 


콩코드가 100명의 승객을 마하 2.2로 실어나른다면, 미국제 SST는 250명의 승객을 마하 2.7에서 3.0의 속도로 대서양을 단번에 뛰어넘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모든 민간기를 막론하여 이러한 전대미문의 비행 속도와 페이로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체 외판의 재료를 콩코드 같은 내열 알루미늄 합금이 아닌 보다 고온의 마찰열에서도 강도를 유지할 수 있는 스테인레스 스틸 또는 티타늄 합금이 채용될 필요가 있었다. 



SST의 유력한 후보 록히드와 보잉사의 목업 


2. 요구 사양


SST의 요구 사양은 기체 메이커 3개사 - 보잉, 록히드, 노스 아메리칸 - 와 엔진 메이커 3개사 - 커티스 라이트, 제너럴 일렉트릭, 프랫 앤 휘트니 - 로 보내졌다. FAA의 예측에 의하면, 1990년까지 초음속 수송기 시장은 500대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까지 북미의 3대 항공기 메이커와 3대 엔진 메이커가 모두 이 경쟁에 참가한 셈이었다. 보잉의 가변익 설계는 1964년 1월 15일에 FAA 승인을 취득했다. 이것은 1960년에 검토 되었던 가변익 모델 733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이 여객기는 공식적으로 모델 733-197로 되어 있었지만, 스탭들 사이에서는 1966 모델이나 모델 2707이라고도 불렸다. 보잉은 사내 명칭인 733으로 불렀지만, 어쩐 일인지 보잉 2707(Boeing 2707)이라는 호칭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기체의 형태는 훗날 가변익기로 만들어진 초음속 폭격기 록웰 B-1A와 비슷했지만, 4기의 엔진이 각각 독립된 4개의 나셀에 담겨 있는 점은 달랐다. 


각사의 시안이 발표되는 동안 펜타곤에서는 초음속 폭격기 노스 아메리칸 XB-70 발키리의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 기술을 응용하려고 했던 노스 아메리칸 NAC-60과 커티스 라이트가 먼저 경쟁에서 탈락했다. 보잉과 록히드는 FAA의 요구 사양에 부합되어 2개사는 신형 엔진을 장착해 시험할 수 있는설계안을 제시하도록 요구되었다. 11월에 상세 설계 검토(Critical Design Review : CDR)가 다시 이뤄졌는데, 이 때 보잉은 본래의 디자인을 약간 수정하여 250석 모델 733-290(2707-100)으로 스케일업하고 있었다. 강력한 제트 배기가 활주로 구조물을 망가뜨리는 사고를 피하기 위해서 4개의 엔진은 수평 미익 아래로 옮겨졌다. 주익이 가장 큰 후퇴각으로 젖혀지면 수평 미익과 합쳐져 델타익형 비행체로 변신하는 프로파일은 마치 훗날 개발된 그루먼 F-14 톰캣과도 닮은 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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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2707의 실물대 목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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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kheed L-2000의 실물대 목업 


3. 보잉의승리


보잉, 록히드 양사는 이전보다 훨씬 세부적인 설계 방안을 제시할 것이 요구되었고, 1966년에 최종 심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보잉은 300석 모델 733-390(2707-100/-200)으로 커져 있었다. 1966년 9월에는 록히드 L-2000과 함께 실물대 목업이 발표되었다. 일련의 심사에 이어 12월 31일에 63,200 파운드의 막강한 추력을 지닐 예정인 제네럴 일렉트릭 GE4/J5P 엔진을 탑재한 보잉의 승리가 발표되었다. 록히드 방안은 보잉 설계안에 비하면 구조가 간단하여 제작이 쉽고 기술적 리스크가 적은 대신 성능이 다소 부족하며 소음 레벨도 약간 더 높을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이것이 결국 고성능을 희망하고 있던 위원회의 눈에 감점 요인으로 작용하여 록히드의 발목을 붙잡았다. 


모델 733-390은 당시 운용중이던 아음속 여객기와 비교해도 최고급 여객기였다. 통로가 2개 있는 와이드 바디에 가로 좌석 배치는 2석 - 통로 - 3석 - 통로 - 2석(2-3-2로 표기된다)이었다. 면적법칙이 적용되어 가늘어진 동체 중앙은 투어리스트 좌석으로 3석 - 통로 - 2석였는데, 당연히 당시 운항되고 있던 내로우 바디(협동체) 여객기 보다 훨씬 굵은 동체가 필요했다. 모형에는 낙하 방지 막대가 있는 오버헤드 스토레이지(머리 짐칸) 외에도 기내 섹션 사이에는 큰 수하물을 보관할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247석 투어리스트 클래스는 시청할 때만 꺼내서 볼 수 있는 텔레비전이 있었으며, 30석으로 편성된 퍼스트 클래스는 인접한 2좌석 사이의 콘솔에 작은 사이즈의 TV가 2개 있었는데 이런 편의 설비들은 당대의 플래그 캐리어 여객기에도 없던 최고급 사양이었다.


보잉은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 개발이 즉시 승인되면 1967년 원형기 제작을 개시해 1970년 초에 첫 비행을 달성할 수 있다. 또한 1969년 초부터 생산을 시작하면 1972년 후반에는 양산기의 첫 비행, 1974년 중반까지는 형식 증명을 취득할 수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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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2707의 호화로운 인테리어

 

그러나 시작 단계에서 가변익 채용으로 인한 중량 증가가 힘겨운 문제가 되었다. 1968년 10월에 발표된 모델 2707-100/-200에 와서는 가변익 방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결국 록히드 방안과 같은 델타익을 채택하게 되었다. 중량을 줄이기 위해 크기를 약간 축소해 234석이 된 새 설계안은 모델 2707-300으로 개칭되었다. 1969년 9월, 실물 크기 모형 완성에 이어 시제기 2대의 제작이 시작되었지만, 이미 원래의 예정보다 2년이나 늦어 있었다. 이 시점에서 팬암과 트랜스월드 항공, 일본 항공과 루프트한자 등 세계 각국의 항공사에서 플래그 쉽으로 임시 주문을 받고 있었고, 그 대부분이 콩코드도 주문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 보잉은 신형 대형 여객기로 보잉 747을 개발하고 있었지만, 이 기체는 보잉 2707이 실용화된다면 화물기로나 쓸 예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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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으로 생산이 결정된 보잉 2707-300의 실물대 목업 


4. 계획 취소 


그즈음 SST 계획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환경 보호론자들이 일단의 강력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고도 비행에 의한 오존층 파괴, 공항에서 발생하는 소음, 초음속 비행이 일으키는 소닉 붐에 우려를 표명했다. 수소폭탄 개발에 협력했던 물리학자 윌리엄 섯클리프(William Shurcliff : 1909~2006)는 자신이 쓴 "SST와 소닉 붐 소책자"라는 책을 통해 초음속 여객기의 시대가 도래하면 북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폭 50마일, 길이 2,000마일의 소닉 붐 띠가 가르지르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초음속 여객기 자체에 반대하며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이런 초음속 비행으로 인해 미국 중부 시민들이 치루게 될 사회적 비용에 관해 꾸준히 경고하며 반대 운동을 벌였고, 이들이 주도한 반 SST 운동은 이윽고 많은 반대 집회가 열리는 원인이 되면서 결국 육지 상공에서 초음속 비행이 금지되게 되었다. FAA 의장이었던 하라비 같은 SST 지지자들은 이런 반대파들의 주장에 관해 "어차피 초음속 비행의 시대는 오고야 만다. 1980년대까지 최소한 2~3종류의 초음속 여객기가 취역할 것인데, 막상 그때가 되면 우리가 지금 나눈 이런 토론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에 관한 농담을 주고 받을 것이다."라면서 일축했지만, 여론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민간 기업이 제작해 운항하는 민간기의 개발에 정부가 자금을 출자하는 것을 원하지 않던 좌파의 움직임도 있었다. 초음속 여객기에 반대 캠페인의 선두에는 위스콘신주 출신의 민주당 상원 의원 윌리엄 프록스마이어(William Proxmire : 1915~2005)가 버티고 서서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이 계획을 "정부의 낭비에 대한 성전"이라고까지 부르며 지탄했다. 이에 공화당 의원인 제랄드 포드(Gerald Ford : 1913~2006)는 보잉 2707은 반드시 실현되어야만 하며, 그것은 1단계에서 5만 개, 그리고 장차 향후 10년 동안 매년 15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맞섰다. 그러나, 이런 격론이 오고 가던 시기에 미국은 베트남전에 뛰어 들었고, 이로 인하여 군비 지출이 눈덩이처럼 늘어났으며 동시에 유인 달 탐사 계획인 아폴로 프로젝트에도 천문학적인 예산을 지출하고 있었다. 자연히 SST 계획은 예산 배정에 관한 우선 순위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2707-200-038-1800x1125.jpg초기안의 상상도는 마치 록웰 랜서 폭격기와 그루먼 톰캣이 뒤섞인 듯 싶지만, 두 기종 모두 비행하기 전이었다. 


1971년 3월, 마침내 의회는 215 : 204 라는 표차로 SST 사업에 관한 재정 지원 중단을 결정했다. 다음 개발을 밀어주는 편지가 보잉에 전해졌지만, 이것을 포함해도 1972 회계년도에 배정된 예산은 겨우 100만 달러를 넘을 정도였다. 이 비용으로는 원형기 제작은 고사하고 만들어 놓은 모형의 철거비와 기타 잡비나 간신히 충당할 적은 액수였다. 자연히 그해 5월 20일, 미국의 초음속 여객기 계획은 전부 중지되었다. 이후에도 각 항공사의 주문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팬암과 트랜스월드 항공, 일본 항공과 루프트한자 등 26개 주요 항공사가 합계 122대나 임시 주문되어 있었다. 예정했던 2대의 원형기도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그 결과, 보잉 2707이 취항한 후에 화물기로 쓰일 예정이었던 보잉 747이 장기 운용하게 되었고, 2017년에 단종될 때까지 1,157대나 만들어졌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만들어진 모형은 해체되었고, 플로리다로 옮겨졌지만 결국 둘 곳이 없어 분해한 채로 격납고에 방치되었다. 캘리포니아의 힐러 항공박물관(Hiller Aviation Museum)은 이를 19년 후에 매입해 일부를 다시 조립해 일반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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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뱅기 2020.06.27 11:01

    보잉 2707 노란색 실물 목업 디자인이 날카로우면서 세련된 것이 지금 봐도 멋지게 생겼네요

  • profile
    쿵디담 2020.06.28 17:27
    저때 실현되었다면 아마 그후로도 초음속 여객기 시대는 지금까지 쭈욱 이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
    참, 동영상이 나나오는데 수정 좀 부탁드릴겠습니다 ^^ㅋ
  • profile
    뱅기 2020.06.28 23:47
    수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전쟁같은 외부 요인으로 인해 중단되었다는게 아이러니 하네요.

    동영상 수정했는데 또 사라졌네요.. 희안하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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